[천일자담] 발해의 등주 급습에 대해 필사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기습했으며 전략이 잘 먹여갔다. 일단 이렇게 평가하면서 이번 천일자담을 시작합니다.

  발해는 국력이 고구려에 비해  1/3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임금의 동생이면서 매국노로 돌아선 대문예(大文藝)가 했던 말이라 언짢기는 하지만요. 틀린 말이 아닌 까닭을 집으면 이렇습니다. 고구려의 중심지인 요동(遼東)과 평양(平壤) 일대가  전쟁으로 황폐화가 되었던 점이 가장 큽니다. 또한, 고왕이 나라를 세우면서 본거지를 둔 동모산 일대는 고구려 시대에는 외딴 지역에 속한 편이었습니다. 남한으로 비유하면 무진장 같은 지역이다. 이런 자조스런 표현을 합니다.


  더구나 (唐)은 개원의치(開元之治)로 중흥기를 구가하는 상태입니다. 장문휴가 이끈 발해군의 등주 급습을 내세우는라 당황(唐皇)이 누구인지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데 명황(明皇)으로도 칭송받는 당 현종(唐 玄宗)입니다. 그가 군사적 재능이 없더라도 임금으로서 마땅히 있어야할 정치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그런만큼 국력이 나날이 커갔으니 - 개원의치로 한정해도. 토번과 돌궐을 비롯한 강적과 대치하는라 전력을 발해에 집중할 수 없는 정세를 감안해도 말입니다. - 고당전쟁에서 입은 치명타를 간신히 벗어난 발해에게는 국력차이가 상당했을 텝니다.


  여기에다 발해를 더욱 골치아프게 했던 존재가 흑수말갈(黑水靺鞨)입니다. 말갈(靺鞨)로 통칭된 여러 부족 중에서 흑수말갈이 당에 귀부하면서까지 발해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 말갈 세력도 흑수말갈처럼 당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친당파인 대문예를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까지 흑수말갈과 전쟁을 불사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후삼국시대에서 고창 전투를 앞둔 고려와 엇비슷한 상황으로 바라봅니다.


  등주 급습이 있기 전까지는 발해가 당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본거지가 평양을 수도로 두었던 고구려에 비해 멀리있는 편이며 거란(契丹)이 완충 지대에 있다는 이점이 있긴해도 말입니다. - 고당전쟁 때 고구려가 불리해진 까닭 중 하나가 거란이 고구려에 복속된 세력마저 당의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 이런 까닭으로 돌궐 편에 든 거란을 지원하며 당과 항쟁했으나 이들이 참패를 했으며 거란에 복속된 (奚)족이 당에 항복하는 사태까지 전락합니다. 당이 거란을 손을 보았으니 다음으로는 발해를 손볼 차례였습니다.


  쥐가 고양이를 문듯이 궁지에 몰린 발해는 궁여지책으로 등주(登州)를 급습했던 듯 합니다. 그렇긴 해도 이 방책을 쓰지 않았으면 발해가 당의 위세에 밀려 위축되고 결국에는 어이없이 무너졌을 거라고 바라봅니다. 장수 이름이 장문휴(張文休)로 기록되는 점 말고는 상세하지 않으나 등주 자사 위준이 전사할만큼 급습 효과는 상당했을 거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주도권를 잡은 발해는 전에 손잡았던 거란, 돌궐과 함께 당을 압박합니다. 여기에 당황한 당은 대문예를 사령관으로 삼으면서 방비합니다. 저로서는 어차피 발해로 침공할 군대였는데 급습을 당해 기세에 밀리니까 수비에 급급했던 듯 합니다. 육전도 상세하지 않으나 당군이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고 짐작합니다.



  발해가 이렇게 당을 압박하다가 돌궐의 카한이 죽자 급작스럽게 화해합니다. 돌궐이 카파간이 피살되어 혼란에 빠지자 더이상 당과 싸울 여력이 없어졌습니다. 여기에다 거란이 또 당한테 참패를 당하니까 완충 지대를 다시 잃었다는 불리한 전황에 놓였습니다. 발해 무왕은 전쟁 도중에 사로잡은 당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당과 화친을 합니다. 당한테는 일단 위신을 높힌 셈이긴 해도 발해는 나라를 온전히 지켰다는 점에서 실속을 단단히 챙겼다고 봅니다.


  요새 유행하는 얘기 중에 쫄지마가 있습니다. 발해는 당한테 쫄지 않은 덕분에 불리한 정황에서도 나라를 지켰다고 봅니다. 이 문장에서 이 유행어 하나를 꺼내면서 이번 천일자담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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