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자담] 카를 5세 : 영광이 드높은만큼 고난이 깊었던 군주. 필사


  어제 천일자담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언급해서 그런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른 군주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전문가나 견식이 깊은 사람에 비하면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긴 해도 말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있는 역대 군주에서 가장 유명할 이를 살짝 얘기합니다. 바로 카를 5세입니다.


  영광이 드높았던 부분부터 언급합니다. 카를 5세는 써야할 왕관이 아주 많을만큼 여러 나라의 군주로 있었습니다. 일일이 적으려면 토나올 정도입니다. 여기에서는 중요한 지역만 적습니다. 플랑드르, 에스파냐 왕국, 오스트리아 공국, 부르고뉴 공국, 신성 로마 제국,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이외. 여기까지만 언급합니다. 플랑드르부터 맨먼저 제기한 점에 의아하실 분이 계실 텐데, 카를 5세한테는 매우 중요한 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이 플랑드르에 속하는 헨트이며,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플랑드르에서 지냈으니까요. 또한, 그 땅에 지낸 삶이 카를 5세한테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고 바라봅니다. 동군연합으로 느슨하게 묶인 여러 나라의 군주를 역임한 자에 걸맞는 자질과 정치 감각이 그 땅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한편,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의 주요한 영지에도 여기에 뺀 까닭은 그 땅을 실질적으로 다스린 이가 동생인 페르디난트 2세여서 입니다. 또한, 헝가리가 모하치 전투로 오스만 제국한테 패망하자 어부지리로 헝가리 왕국의 서쪽 영토를 차지했던 점도 마음에 걸리니까 여기에서는 카를 5세가 다스린 영역에서 빼봅니다.


  카를 5세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잇도록 태어나고 자랐으며 거기에 걸맞는 군주로 지냈습니다. 기독교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저는 이렇게 평합니다.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거듭났으며 나중에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면서 프랑스 왕과 왕자를 잡는 성과를 거둡니다. '테르시오'로 대표하는 강력한 군대가 있었고 실무자인 야전 지휘관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바라보지만요. 뛰어난 수하를 두는 것도 군주의 행운이자 영광이다. 이런 궤변을 덧붙여 봅니다.


  영광이 기독교도 군주 중에서 가장 높았을 텝니다. 제가 조잡하게 썼지만요.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합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듯이 영광이 드높은 이상 거기에 따른 고난이 아주 깊었다고 바라봅니다. 평생을 마음놓고 지낼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부담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외할아버지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를 이어 에스파냐 왕이 되었을 때에는 현지 귀족이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었습니다. 이를 '코무네로스의 반란'으로 일컫습니다. 현지인이 카를로스 1세가 된 그한테 항쟁을 한 까닭은 전쟁으로 생긴 무거운 과세와 카를 5세가 카스티야 사람을 무시하고 플랑드르 사람만을 등용하는 인식을 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봉기는 10년을 걸친 지속되었으며  군대를 통해 반란군을 진압을 하고 카스티야인의 요구를 들어준 다음에야 끝낼습니다. 그 뒤에는 카스티야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꼼짝없이 놓였지만요. 이렇게 써놓으니 카를 5세가 이런 고난을 거듭해야 하는 숙명으로 바라봅니다. 사정을 헤아리지 않은 이가 보면 부럽겠지만요.


  그가 싸워야 했던 적이 많았으며 이들이 집요하게 펼치는 싸움에 맞닿드려야 했습니다. 프랑스부터 언급해 봅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로부터 시작된 악연이 대대로 이어지니까요.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프랑스와 다퉜습니다. 이는 선대부터 있던 싸움이라 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울게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신성 로마 제국의 옥좌를 두고 철천지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다음 황제가 누가 되는지 선거가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기본으로 아는 상식이나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권이 있는 선제후가 투표해서 황제를 정합니다. 이 경우에는 세습이 되지 않을 경우가 있지요. 또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는 강력한 경쟁 상대였습니다. 정공으로는 황제 자리를 계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푸거(Fugger) 가문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 선제후한테 뇌물 공세를 합니다. 그 바람에 황제 자리를 뺏긴 프랑수아 1세는 앙심을 단단히 품었을 텝니다. 이렇게 불구대천지수가 된 데다 파이바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심한 굴욕을 받았으니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한테 해를 가하는 짓은 어떠한 경우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교도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결탁한 점이 그 한 예입니다. 프랑스와 싸워 이긴 경우가 많았으나 거듭된 전쟁으로 생긴 부담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부왕을 이어 에스파냐 왕이 되고 난 뒤인 155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한 점에서 섬뜩한 기분이 듭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막대한 은으로 가장 부가 많았을 에스파냐가 이런 막장 사회까지 몰린 이유가 바로 거듭된 전쟁입니다. 프랑스만 싸운 게 아니고 여러 세력과 거듭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프랑스는 대대로 서유럽에서 국력이 가장 강력한 나라로 손꼽혔습니다. 속된 말로 여러번 관광을 당했으나 기초 국력이 월등하게 좋으니까 이를 토대로 버티고 어떤 경우에는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잉글랜드와 벌였던 <백년 전쟁>이 그 한 예입니다.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에는 우세를 점해 이탈리아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조약으로 부르고뉴를 프랑스한테 넘기는 것을 감수했습니다. 다른 적과 싸워야 했으니까요.


  그 때 기독교도에게 이교도인 이슬람 국가 중에 가장 강력한 나라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습니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세계 제국으로 우뚝 섭니다. 거기에다 카를 5세처럼 능력있는 이가 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술레이만 대제>입니다. 카를 5세는 술레이만 대제가 술탄으로 있는 오스만 제국과도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빈 포위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 군대를 기적처럼 물리친 성과가 있었으나 다른 방면에서는 패전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프레베자 해전을 그 사례 하나로 집어냅니다.


  기독교도 연합 해군이 패했어도 피해는 사소한 편이었습니다. 사령관인 안드레아 도리아가 손실을 무릅쓰고 공격을 감행했다면 바르바로사로 일컫는 카이르 앗 딘이 이끈 오스만 투르크 해군을 격파할 수 있었을 텝니다. 그런데 손실이 적은 편이었도 이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중해에서 패권을 더욱 장악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전투에 참여한 바바리 해적은 지중해 곳곳을 노략합니다.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해안이 그 이교도 해적한테 노략질을 당했으니 카를 5세가 쥐는 부담이 적지 않았을 텝니다. 군주는 자신이 다스리는 자들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길게 써서 그런지 지칩니다. 집중이 많이 부족하다. 이렇게도 자평합니다. 더 흐트리기 전에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할 것 같고요.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같은 강국과 맞서 싸우는 일도 벅찼습니다. 그런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듯이 여러 군소 세력이 카를 5세한테 대항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골치아픈 존재가 사악한 교황은 클레멘스 7세와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신교도로 돌아선 독일 내 루터파 제후였습니다. 그 사악한 교황이 이편에 붙였다 저편에 붙였다 신의없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파비아 전투 이후에 포로에서 벗어난 프랑수아 1세와 손잡고 맙니다. 이를 '코냑 동맹'으로 지칭하며 헨리 8세도 여기에 가담합니다. 여기에 격분한 카를 5세는 가혹한 응징을 합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어도 교황이 한 행동은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군대를 파견해 로마로 쳐들어 가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문제는 그렇게 파견한 군대 중에는 루터파 병사가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을 향한 맹렬한 적개심을 품은 이들은 로마를 불태우는 일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적그리스도인 교황을 직접 목졸라 죽이자. 이 의도로 밧줄을 지참한 이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지휘자가 이들을 감당할 수 있으니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통제가 되었습니다. '지독한 부르봉'으로 일컫는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사하니까 용병들이 지휘관의 복수다는 명목을 들어 미쳐날뛰고 말았습니다.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다>. 지치니까 이 표현으로 넘어갑니다. <사코 디 로마>로 일컫는 이 대재앙은 이탈리아에 있는 르네상스가 마감되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크나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카를 5세한테도 클레멘스 7세같은 다른 이에 비해 덜하지만 이 만행이 일어난 책임을 묻을 여지가 있지요.


  다음으로는 독일 내에 있는 카를 5세한테 항거한 루터파 제후입니다. 이 때문에 카를 5세가 바랬던 중앙 집권이 좌절되고 맙니다. 종교 개혁이 없더라도 매우 힘들었지만요. 그런데 종교 개혁이 선제후가 카를 5세한테 개기는 명분이 되었습니다. 작센 공 요한 프리드리히를 비롯해 루터파로 개종한 이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카를 5세에게 대항합니다. 이따금 반란을 일으킨 제후를 사로잡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따금 화의를 제의했지만 쉽사리 되지 않았습니다. 1948년 있는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는 미몽책이었다. 이렇게 살핍니다. 다음 세기인 17세에는 독일에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니까요. 종교 개혁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촉진되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분열은 카를 5세도 수습할 수 없다고 살핍니다.



  이 문장에서 끝내자. 이 마음이 드니까 여기에서 급히 끝냅니다. 간단히 쓰고자 하는 얘기가 예상 밖로 아주 깁니다. 그래서인지 이 군주에서 모티브를 딴 소설을 쓰면 쉴틈이 생기지 않겠군. 이런 우스개소리를 합니다. 여기에서 살짝 언급하지만, 카를 5세가 거듭한 고난은 결국에는 <왕으로 죽는 일>에서 벗어납니다. 여기에서 카를 5세가 져야했던 부담이 상당했다고 바라봅니다. 왕위에서 물려나면서 아들과 동생에게 합스부르크가 차지한 영지와 지위를 나뉘는데 그였기에 이 <가시 면류관>을 감당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짓누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그는 평범한 수도사로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왕위에서 물려난 지 3년 만에 죽었어도 그 기간에서는만큼은 매우 평한했을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군주의 말년치고는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그가 군주로서 내면서 겪은 고난이 상당한 점을 어렴풋이나마 알기에 <매우 평안한 여생>을 보냈다고 평합니다. 그가 군주로 지낸 나날이 찬란할만큼 영광스러우면서도 쓰디쓸만큼 고난이 심하다는 점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덧글

  • 데프콘1 2013/02/12 14:25 # 답글

    말그대로 먼치킨이었죠. 카ㅡㄹ 5세가 없었으면 폴란드랑 독일지방까지 오스만 제국이 밀고 들어왔을 겁니다
  • 솔롱고스 2013/02/16 22:40 #

    이 의견에서는 약간 갈립니다. 실무자가 뛰어났다. 저는 이렇게 살핍니다.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있던 덕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펼친 무시무시한 공세를 막아냈다고 봅니다. 행운을 비롯한 여러 행운이 있고요. 이렇게 말하지만, 카를 5세가 실무자를 잘 뽑았다는 점에도 손을 치켜세웁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하는 사항은 군주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덕목이거든요. 이를 보았을 때에는 카를 5세는 첫 문장에 나타난 얘기에 딱 들어맞는다고 살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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