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자담/몽골사] 쿠빌라이 칸이 고려를 존속시킨 이유 필사



 

  생각나는대로 적고 봅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하게 연계된 상황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쪽에서 보고 써야 마땅합니다. 지난 천일자담 중에서 고려 쪽에서 바라본 부분이 있으니 이번에는 몽골 쪽에서 바라봅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제목에 나타난 대로 쿠빌라이 칸입니다.


  명분실리. 이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명분을 먼저 얘기했으니 여기부터 적습니다. 형인 몽케 카한이 죽고나서 제위 계승 분쟁으로 동생인 아리크 부케와 내전을 벌였을 때, 고려에서 온 태자가 쿠빌라이 칸 편을 들었습니다. 원래는 몽케 카한에 가야하나 그가 죽자 다음 카한이 될 사람한테 찾아간 셈입니다. 고려한테는 신의 한수가 되었습니다. 편을 잘든 덕분에 고려가 계속 존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쿠빌라이 칸한테도 좋았습니다. 몽골 기준으로는 쿠빌라이는 찬탈자입니다. 아리크 부케가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받아 대칸으로 추대된 상황에서 반기를 들었기에 이런 견해를 내비칩니다. 몽골 귀족의 다수 뿐만 아니라 태후까지 아리크 부케를 지지했습니다. 반면에 쿠빌라이를 지지한 쪽은 그의 직속 부하에 해당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했던 곳도 문제가 되어 보입니다. 개평부(開平府). 대원 울루스가 세우고 나서는 여름철 수도인 상도(上都)가 되는 곳인데  여기가 몽골 본토에 해당할까는 의문을 내비칩니다. 쿠빌라이 측이 정통성과 명분이 밀리는 상황에서 고려 태자가 오니까 취약한 점을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고려 태자가 찾아오니까 기뻐했습니다. 


 

  이제 실리를 얘기합니다. 내부의 적이 팽창하지 않도록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동방 삼왕가입니다. 테무친의 동생인 카사르, 카치운, 테무케가 선조가 되는 이 제왕(諸王)가는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카한으로 된 과정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테무케의 손자이자 '후계자'가 된 타가차르가 쿠빌라이 칸을 지지한 일이 결정타였습니다. 옷치킨 가문의 다가차르가 지지하니까 카사르, 카치운 가문도 쿠빌라이 칸을 지지했습니다. 전력이 강한데다 모자를 정통성도 보완이 되니까 쿠빌라이 칸이 제위로 가는 길이 순탄했습니다.


  동방 삼왕가는 쿠빌라이 칸을 도와주긴 했으나 이해 관계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를 도와준 내막이 몽케 카한이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방 삼왕가를 이전 카한인 구유크처럼 압박했던 과거였습니다. 쿠빌라이가 동방 삼왕가의 지지를 받아서 카한이 됬으나 형인 몽케처럼 중앙집권을 추진합니다. 타가차르가 살아있을 때에는 쿠빌라이와 맺은 친분으로 평온을 유지했으나 그가 죽고나서 나얀이 옷치킨 가문의 수장이 되면서 잠재된 불화가 표면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1287년에는 냐안의 난으로 일컫는 반란이 일어나고 맙니다.


  윗문단에 나타난 반란은 한참 뒤에 일어나지만, 쿠빌라이 칸은 동방 삼왕가에게 있는 위험을 숙지했을 텝니다. 이런 까닭으로 저는 고려를 유지한 목적에는 만주에 본거지를 두면서 세력을 키워온 동방 삼왕가가 더 이상 팽창하는 속셈이 숨겼다고 짐작합니다. 동녕부와 쌍성총관부, 그리고 탐라총관부를 몽골령으로 편입시키면서 고려를 견제하면서 부마국으로 삼아 고려 왕실을 황금 씨족으로 편입하는 제안을 살피니 쿠빌라이가 정치 수완이 뛰어나다고 바라봅니다. 주치와 차가타이에서 일어난 극심한 불화에서 잘 나타나듯이 '부계 승계'만이 인정되는 몽골 사회에서 쿠빌라이 칸이니까 할 수 있다는 파격 조치로까지 생각합니다.



  목적이 있으니까 잡아먹지 않고 살려주었다. 비록 목에 개목걸이를 걸어놓았어도. 두 문장으로 이번 천일자담를 쓴 목적을 적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고려를 존속시킨 이유를 제 서툰 견해로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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